[자유 게시판] 잡다한 역사이야기 20편 - 예송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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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esa224입니다. 오늘은 우리 역사에서 보면 볼수록 이상했던 예송논쟁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최대한 그때 당시 사람들을 이해해보려고 해도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이니 그래도 조금이라도 선조들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써보려고 합니다.
예송논쟁?
예송논쟁은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일어난 문제입니다. 도대체 뭘가지고 그렇게 싸웠냐 하면 바로 상복을 몇년 입느냐하는 문제로 싸운것이지요.
상복이란 이런거 입니다. 삼베로 만든 거죠. 요즘은 검은색 정장이 대세입니다만 전통 상복도 입는곳이 있다고 합니다.
때는 1659년 북벌을 꿈꾸던 효종의 사망이후 장례식에서 문제가 터집니다. 바로 인조의 부인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년입어야 하는 문제가 된것이지요. 참고로 이 자의대비는 효종보다도 5살이 어렸습니다. 인조가 말년에 결혼한 사이라서 나이차이가 좀 났죠. 일단 효종과 인조의 가계도 그리고 당시 조선의 법도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인조에게는 여러아들들이 있었지만, 왕비사이에서 난 아들로는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효종이 있었습니다. 소현세자와 효종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끌려가 볼모생활을 했던적이 있었지요. 그때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새로운 문물에 감화되어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인조 눈밖에나게 됩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되는데 이것때문에 독살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래서 소현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이 소현세자에게는 어린아들들이 3명이나 있었는데, 원래대로라면 이 아들들이 세손이 되어 왕위를 물려받았어야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차남 효종에게 왕위가 돌아갑니다. 그래서였을까요? 효종은 약점을 하나 가지게 됩니다. 즉 명분은 소현세자의 아들들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효종은 자신읭 왕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북벌을 계획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했던 효종이 청나라의 역량을 몰랐을까요?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뤄보기로 하고, 하여간 효종은 그렇게 약점을 가진채 북벌의 꿈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효종의 아들이 왕에 오르니 그가 현종입니다.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골치 아픈 문제에 시달리게 되니 바로 이 예송논쟁입니다.
차남이냐? 왕이냐?
조선의 법도에서 부모가 죽으면 3년상을 치르게 됩니다. 부모의 묘소곁에 움막을 하나 만들어 거기서 상복을 입고 3년을 보내야하지요. 반대로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죽으면 1년만 입는데 특별히 장남일경우는 똑같이 3년을 입는다고 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되죠.
당시 최고의 정치가였던 송시열
현종무렵 집권세력은 서인이었습니다. 특히 송시열과 그의 일파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지요. 그럼 효종이 죽었으니, 과연 자의대비는 어떤 상복을 입어야했을까요? 장남(소현세자)는 이미 죽었고 차남(효종)이었으니 서인은 차남이니까 1년복을 입어야한다고 주장했고, 그 의견이 받아졌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이 트집을 잡히는 명분이 되지요.
서인에게 반격을 노리던 남인은 이 문제를 걸고넘어집니다. 왕의 정통성을 이었으니 당연히 장남대우를 받아야하고, 3년을 입어야한다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만일 이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서인의 주장은 자칫 왕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큰 역모로 몰릴수 있는 상황이었죠. 그리하여 남인과 서인이 치열하게 대립하게됩니다. 남인의 주장을 따르자면 비록 차남(효종)이긴 하지만 왕이되었으니 정통성은 효종에게 이어지는 것이고, 서인들 주장에 따르자면 장남(소현세자)의 아들들에게 정통성이 이어지는 효종의 아들 현종에게 정통성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이러자 서인은 어쩔수 없이 경국대전과 대명률-명나라의 법전입니다-에 따라서 부모보다 아들이 먼저 죽으면 1년을 입는다고 되어있으니 이에 따르는 것일 뿐이라고 반격합니다. 결국 서인과 남인의 싸움이 끝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현종은 집권세력 서인의 손을 들어주고-즉 경국대전과 대명률을 따른다는-남인들을 유배보내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짓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충 덮어버렸을 뿐이지 서인은 여전히 효종을 차남으로 인식하고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왕후인가 둘째 며느리인가
그렇게 몇년이 지나고 또 다시 문제가 터졌습니다. 바로 효종의 부인이었던 인선왕후가 먼저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현 왕이었던 현종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다시 또 문제가 생긴것이지요. 이번에도 자의대비는 살아있었기때문에 며느리를 위해 몇년 상복을 입어야하는가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첫번째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경국대전을 따르자니 문제가 심각해지게 생겼습니다. 경국대전에는 장남, 차남 다를거 없이 1년 입어야한다고 규정되어있지만, 며느리들의 경우 맏며느리는 1년, 둘째며느리부터는 9개월이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집권 세력 서인은 일단 왕후니까 1년복으로 하자하고 왕의 결재까지 받아갑니다. 문제는 그렇게 따지고 보니 송시열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효종은 차남-그리하여 서인들은 어쩔수 없이 왕에게 다시 9개월상복을 입자고 번복하는 의견을 올리게됩니다.
문제는 뭐였을까요? 당시 소현세자비 강씨는 역적이었던 상태였습니다. 이것도 음모론이 있긴하지만, 어찌되었건 인조가 직접 역적으로 지목해서 처형까지 한 상태였고, 복권되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선왕후를 위해 자의대비가 9개월 복을 입는다면 역적 소현세자비 강씨를 장남의 며느리로 인정한다는 이야기가 되고, 그녀의 아들들에게 왕조의 정통성이 이어진다는 주장과 같습니다. 즉 서인이 역적을 두둔한다는 이야기가 될수 있는 크나큰 문제가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열받은 현종은 서인을 전부 파직하는 걸로 대응했습니다만 송시열은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즉 효종은 왕이긴 하지만 차남이었던 것이기 때문이었죠. 일단 궁지에 몰린 서인은 주례와 의례에 맏며느리도 9개월 상복을 입는다라는 것을 찾아냈지만 너무 구차한 변명이었죠. 그리하여 서인이 집권세력에서 쫓겨나고 남인이 집권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만 현종도 곧 사망하여 이 예송은 흐지부지 되게 됩니다.
보면 볼수록 상복입는 것 가지고 왜 싸우냐 싶긴 하지만 그때 당시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이 예법에 따라 왕조의 정통성이 어디로 가느냐가 달린 문제였습니다. 서인의 의견을 따르자면 왕이 아닌, 소현세자의 아들들에게 정통성이 이어지는 것이니, 효종과 현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견까지 이어질수 있는 문제입니다. 물론 서인이 그정도 까지는 아닐테고, 아마 서인이 생각하기에 왕과 사대부도 똑같다라고 생각한것 같습니다. 즉 효종이 비록 왕이었어도 어찌되었건 장남은 따로 있고, 차남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지요. 반면 남인은 이미 왕이되었으니 왕조의 정통성은 효종에게 갔고, 그 것을 인정하자는 의견이었지요. 즉 왕과 사대부가 다르니 효종이 차남이긴 했지만 왕이되었으니 장남과 다름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논쟁은 왕조의 정통성을 제대로 설립하기 위해 붙은 논쟁이었지요. 그래도 이 논쟁으로 귀양이나 파직은 많이 당했지만,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이렇게 왕위계승에 관한 문제가 많았고, 대부분은 피바람을 동반한 전쟁으로 이어졌으니 조선의 경우는 평화적인 토론수준이었죠. 지금 시선으로 보면 저게 뭐야 할지 모르지만, 당시 조선의 시각으로 보면 아주 중요한 문제였으니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토론 문화가 잘 이어졌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