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잡다한 역사이야기 11편 - 당나라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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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esa224입니다. 오늘의 역사이야기는 오합지졸 군대의 대명사 당나라 군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흔히들 군기빠지고 엉망인 군대를 일컬어 당나라 군대라고 하는데요. 어쩌다 당나라 군대가 그런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 이야기 해보려고합니다.
당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사람들이 잘모르는 것중 하나가 당나라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진-한-수-당-송-원-명-청으로 이어지는 중국 통일 왕조중에 당나라는 손꼽히는 강국중 하나였습니다.
당나라의 영역 지도 입니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삼국지가 펼쳐진 이후에 5호 16국시대를 걸쳐서 중국을 통일한 나라는 원래 수나라였습니다. 초대 황제인 수문제는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중국을 통일할수 있었죠. 그러나 수나라는 2대 황제 수양제때문에 진나라 테크를 타서 멸망하고 맙니다.
몇년전 연개소문 드라마에서 수양제 역으로 열연을 펼치셨던 김갑수씨.
수양제는 무리한 토목공사뿐만아니라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서 고구려 원정을 수차례 나섰고, 결국 수나라는 지방반란으로 멸망하지요. 그렇게 다시 중국이 쪼개지나 싶었지만, 바로 뒤이어 등장한 당나라 덕분에 쪼개지지 않고 다시 통일 국가를 완성하게 됩니다.
강남의 물자가 강북으로
중국은 원래 황하 유역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장강유역도 거의 1000여년 넘게 쓰다보니 조금씩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었지요. 그렇기에 중국인들은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양쯔강 유역이 발전하기 시작한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지 오나라 시절부터입니다. 그후 북쪽에서 내려온 이민족들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강남으로 내려가 강남의 물자가 점차 강북을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정치의 중심은 여전히 강북이었고, 수나라 역시 강북을 기반으로 양쯔강을 넘어가 국가를 세운 나라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강남의 물자를 강북으로 이동시킬 방법을 고심했고, 그 방법으로 선택된게 운하였습니다. 황하와 양쯔강을 잇는 운하였죠. 물론 땅을 파서 운하를 만든게 아니라, 중간중간에 잇는 강들을 연결해가며 운하를 팠냈습니다. 그리고 수양제는 욕을 엄청 먹어가면서까지 이 운하를 완성시키죠.
욕먹어가면서 운하를 뚫은 수양제, 운하는 그의 폭정의 상징중 하나였지만, 지금까지도 운하는 잘 써먹고 있습니다.
그후 수나라가 멸망하고, 혼란이 계속되었다면 이 운하는 막혀서 기능을 못했겠지만, 당나라가 들어서는 바람에 이 운하는 중점적으로 관리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강남의 어마어마한 물자가 강북으로 수송되기 시작하지요.
간단하게 예를 들면 수레로 쌀을 300kg 정도 운송할수 있다고 치면 배 한척이 3톤정도 즉 10배씩 운송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당나라는 이 운하를 탁군, 현 베이징까지 연결하는데 성공합니다. 수도 뿐만 아니라 대 고구려 원정출발지였던 베이징까지도 물자를 운반하는 시스템이 갖춰진것이죠. 이것은 불행하게도 한반도에 있는 국가들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역대 황제중 손꼽히는 당태종
거기에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더욱더 불행한게, 하필이면 당시 당나라 황제는 현재도 역대 중국황제 중 TOP 3안에 들어간다는 당태종이었습니다. 그는 당나라 건국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었고, 군사적 재능뿐만 아니라 수나라 시절 고구려원정으로 지친 민심을 달랠줄 아는 행정가 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사람들을 다스리는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었고, 사람 보는 눈도 좋아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태종 시기를 정관의 치라고 해서 중국 태평성대중 하나로 기록하고 있지요. 그렇게 당나라가 수나라 시절의 혼란을 잠재우고 국력을 키우니, 당연히 군대도 강력해지기 시작합니다.
당나라 군대와의 충돌
그렇게 당군이 세지기 시작하자, 처음으로 노린게 북방의 이민족 돌궐이었습니다. 돌궐은 중국 혼란기때 북방에서 내려온 이민족중에 하나로 크게 서돌궐과 동돌궐로 나뉩니다. 당태종은 동돌궐을 굴복시켜 자기 세력권에 편입시켰고, 서돌궐은 더 멀리 서쪽으로 쫓아 냅니다. 이 서돌궐이 트르크 현 터키의 조상이 되지요.
문제는 동돌궐이 고구려와는 동맹관계였었는데, 고구려가 혼란에 빠진 사이 돌궐이 굴복해버려서 고구려는 중요한 아군을 잃게 됩니다. 만약 고구려가 혼란상황이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했을텐데 말이죠.
현대 터키가 우리나라보고 형제의 나라 이야기 하는게 이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뭐 현실은 립서비스 수준이지만요 ^^;
고구려의 대혼란
그런데 고구려가 어쩌다 이런 시기에 대혼란을 겪게 되었을까요? 그동안 고구려는 중국의 통일 왕조와 제대로 싸워본적이 없었습니다. 한나라 시기에는 아직 나라가 작아서 한나라가 신경을 쓰지 않았었고, 우리가 잘아는 삼국지 시절 위나라의 관구검과 싸우다 대패한적도 있었습니다. 그후 광개토대왕 장수왕 시절에는 중국이 분열되었던 5호 16국 시대였고, 그렇기에 고구려는 중국을 얕보고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그런데 막상 수나라가 들어서자 고구려는 생전 처음 겪는 일을 겪게 됩니다. 수문제 시절 무려 30만의 대군이-뭐 뻥튀기를 했다고 하지만-처들어 온것이죠. 물론 고구려는 잘 막아내었고, 큰 피해를 입고 수나라는 물러났습니다만, 문제는 바로 수양제때의 대규모 침입이었습니다.
수문제의 대규모 침입을 막고 자신감을 얻었는지 수양제시절 고구려가 먼저 수나라를 건드립니다. 현재의 베이징 근처까지 처들어갔다고는 하는데 하여간 이 선빵을 맞은 수나라는 어마어마한 인원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무려 100만에 달하는 인원을 끌어모아 공격했죠.
첫부대가 떠나고 마지막 부대가 떠날때까지 40일이 걸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 유례가 없는 대침공에-이 병력기록 동원은 후에 1000년이 지나서야 1차세계대전때 깨집니다-고구려는 정말 국력을 총동원해 막아야만 했습니다. 수나라 별동대가 수도 평양까지오는 엄청난 침공을 막아낸 고구려는 막긴 막았지만 막은게 아니었을정도로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이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였을까요?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설때까지 중국 혼란기동안 고구려는 피해를 복구하고자 노력했지만 피해 복구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당나라가 들어서자 고구려도 중국 통일왕조의 힘을 느꼈는지, 최대한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고구려 세자가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갈 정도였죠.
하지만 고구려도 당나라가 언젠가는 침입해 올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평화적일지는 몰라도 전쟁을 착실히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요하를 따라 성을 잇는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한게 이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구려를 흔드는 대 사건이 발생합니다.
고구려는 여러 인종이 섞인 다민족국가였습니다. 말갈족있었고, 돌궐족도 좀 있었고, 우리 조상님들도 계셨겠죠. 그리고 장수왕이후로 한반도로 내려왔기 때문에, 한반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크게 만주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국내성파가 있었고, 한반도를 기반으로 하는 평양성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양성파에 속하는 사람으로 연개소문있었죠.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고구려 최고 귀족인 대대로 였는데 아버지가 죽자 연개소문이 그 자리를 잇고자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반대파가 연개소문의 자리 계승을 반대했죠. 포악하다는 이유로 말이죠. 그래서 연개소문은 반대파를 찾아가 머리를 숙이며 사죄해가며 후에 자신이 포악한 짓을 한다면 자리에서 쫓아내도 좋다고 하며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그 설득에 넘어간 사람들은 결국 연개소문의 자리계승을 허용했는데, 이때 연개소문이 아마 복수심을 불태우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그후 반대파들은 아예 연개소문을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 바로 연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본거지를 떠나 적대파 한가운데로 보내버릴려는 계획을 세우죠. 그러나 이 계획인 연개소문의 귀에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연개소문은 선수를 칠 생각을 하고 자신이 천리장성 책임자로 떠나는 날 잔치를 벌여 귀족들을 초청합니다. 그리고 잔치 중간에 자신의 군대를 동원해 참석한 사람을 모두 죽이고 당시 왕이었던 영류왕까지 죽이게 됩니다.
드라마에서 악역 연개소문으로 열연한 최민수씨 드라마는 잘 기억에 나지 않지만 연개소문의 악한 카리스마는 장난 아니었죠.
일본 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죽은 고구려 귀족의 숫자가 180명이라고 했으니, 당시 사회 엘리트 층에 속하는 귀족이 이렇게 죽어나가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을 겁니다. 특히 국내성파의 반발이 엄청 심했죠. 후에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는 안시성도 연개소문의 반대파였는데, 연개소문이 군대를 보내 안시성을 점령하려 했으나 안시성의 저항에 결국 안시성을 장악하는데 실패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당나라와의 전쟁때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오게 되죠.
당나라 VS 고구려
한편 힘을 키우며 명분만을 찾던 당나라는 연개소문의 쿠데타가 좋은 명분이 되어집니다. 이미 조공관계로 편입된 고구려에게 황제의 인정을 받은 왕을 시해하는건 큰 사건이었죠. 이에 당태종은 그동안 마련한 물자와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수나라의 실패를 거울삼아 적당한 병력으로 속전속결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수나라 군대보다도 강력했습니다. 수나라가 끝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던 고구려의 주요요새인 요동성을 함락시키는가 하면, 천리장성을 따라 늘어서 있는 성들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거기에 포로들을 풀어주며 심리전도 시행했죠. 요동성의 함락은 뼈아팠는데, 당시 고구려의 군량이 요동성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 당태종은 호기롭게 평양성으로 진격하기 위해 그 가운데 있는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고구려도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제껏 동원해본적없는 15만의 군대를 동원합니다. 말그대로 전력을 다해 원군을 보냈지요. 하지만 문제는 이 군대가 안시성과 협동해서 움직였어야했는데, 위에 사건에서 처럼 이 군대와 안시성의 군대는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결국 따로따로 싸운결과 안시성 인근 주필산에서 고구려의 15만 군대가 당태종의 전술에 말려 전멸하게 됩니다. 당태종은 이때 사로잡은 말갈기병을 본보기로 생매장했다고 하니 고구려입장에서는 정말 엄청난 타격이었을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당태종도 끝끝내 안시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요동의 혹독한 겨울이 찾아와 결국 철수하기 시작하지요. 이 뒤를 고구려가 쳐서 당태종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중국 전통극 경극이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연개소문은 5개의 칼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이 연개소문을 막아서는게 설인귀입니다.
이덕화씨가 연기했던 설인귀는 당태종의 유능한 장군이었습니다
그후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았으나 고구려 역시 수나라때와는 다른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는 고구려 멸망의 시작이었죠.
당나라 신라와 손을 잡다
당나라는 이제 단독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는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싸울 동지를 찾게 되니 바로 한반도 동남쪽의 신라였습니다. 당시 신라는 진흥왕 이래로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있어서, 인천을 통해 중국과 직접교류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백제 무왕-의자왕이 신라를 엄청 공격했고, 북쪽에서 연개소문 또한 한강유역을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있었죠. 신라는 이 두나라를 막기위해 거의 총동원을 해야했는데, 우리가 잘아는 화랑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실제로 미소년들을 뽑아 만들었다는 화랑 그 이면에는 소년병까지 동원해야 했던 신라의 절박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당시 사신으로 갔던 김춘추가 당태종과 한밤중에 독대를 했을정도라고 하니 당나라 입장에서도 좋은 제안을 했을거라 추측됩니다. 그렇게 당나라-신라, 고구려-백제의 싸움이 시작되죠.
당나라-신라 VS 백제
그리하여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는 먼저 백제를 공격하게 됩니다. 당태종의 뒤를 이은 당고종은 정말 신라를 믿고 도박을 하는데요. 바라 황해를 건너 백제를 직접 공격하는 작전을 실행하게 됩니다.
산동반도에 집결한 당나라군이 바다건너 백제를 직접공격합니다.
당시 사령관 소정방은 이미 서쪽에서 돌궐족을 토벌하는데 엄청난 실력을 발휘했던 장수였고, 당나라군 13만은 그동안 백제가 본적이 없던 군대였습니다. 거기에 백제의 주력군은 모두 신라 전선에 나가있었기때문에 백제는 허겁지겁 군대를 모아 당나라군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신라쪽 5만은 당나라군을 격파할동안 막기만 하는 전략으로 계백의 5천 결사대를 보내게 되지요.
그러나 당군은 말그대로 파죽지세로 백강에서 진을치고 있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에 당도합니다. 계백의 시간끌기도 결국 신라군에게 패배하여 사비성에서 신라군과 당군이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백제는 그렇게 허무하게 10일만에 수도가 함락되면서 멸망하게 됩니다.
백제 마지막수도였던 부여에 가보시면 정람사지에 석탑이 하나 남아있는데, 여기에 소정방이 새긴 낙서가 아직까지도 남아있습니다.
당나라-신라 VS 고구려
그리고 당나라는 최대의 숙원중 하나였던 고구려 정벌을 나섭니다. 이때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의 아들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의 내분으로 이미 말이 아니었습니다. 요동성쪽 방어기지들은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면서 당나라가 쉽게 진군을 해왔고, 신라쪽 방어선은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도가 20개의 성과 함께 투항하면서 없어져 버렸죠. 결국 연남생을 앞세운 당나라군이 평양성까지 진격해왔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또한 평양성까지 당도했습니다. 거기에 백제지방에 남아있었던 당나라군도 올라왔지요. 결국 조금 겨울까지는 버텨냈지만 이듬해 다시 공격해온 당나라군에게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 또한 멸망하게 됩니다.
당나라 VS 신라
그렇게 고구려 백제 모두 멸망하자 당나라는 더나아가 신라를 노립니다. 원래 당나라-신라의 협정은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가진다라는 형태로 맺어지지 않았을까 추측되는데 당나라는 백제지방에는 웅진도독부를, 고구려지방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며 직접 다스리고자 했습니다. 거기에 더 나가서 신라 경주지방에 계림대도독부를 만들고, 그 자리에 당시 신라 왕 문무왕을 임명합니다.
그러자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에 돌입하는데, 이때 백제,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도와 당나라를 공격합니다. 특히 고구려 부흥운동군과 함께 요동까지 공격에 나서죠.
그러는동안 신라의 주력군은 옛 백제지방을 총공격합니다. 거기에 남은 당군을 몰아냄과 동시에 백제를 완벽하게 지배하기 위해서였죠.
당나라의 대반격
그러나 당나라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당나라를 위협하던 세력이었던 토번-현 티벳트-를 견제하기 위해 주력부대들은 전부 서쪽에 가있었기때문에 요동에 주둔하던 말갈족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죠. 신라는 이 군대를 막기 위해 고구려 부흥운동군과 같이 막으려 했습니다만 고구려 부흥운동군이 내분으로 전멸하자 신라 혼자 이 군대를 막게 됩니다. 처음에는 승리했으나 신라군이 무리하게 추격하다가 당군의 반격으로 대패했고, 고위 지휘관들이 거의 전사할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게됩니다. 그후 신라는 임진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해 일단 당나라 군을 막고, 주력군을 총동원해서 백제지방을 빨리 정복하자는 전략을 실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백제지방을 순조롭게 점령하게되었고, 신라는 다시 심기 일전하여 당나라와의 일전을 벌이게 됩니다.
당나라군대, 당나라군대가 되다.
그러나 이미 이시기에 한반도에 진출한 당나라군대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당나라군대가 되어버립니다. 이미 당나라의 정예군은 토번을 상대하기 위해 서쪽지방에 가있었고, 한반도에 와있는 당나라군대는 이미 보급선이 길어져서 보급도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 요동의 유목민족부대였습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을 위협할정도로 강력했던 토번, 토번은 당나라 정예병을 수없이 패배 시키고 그 설인귀 또한 패배시켰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지방으로 정복한 신라의 정예군이 당나라군과 마주쳤을때는 정말 오합지졸에 군기도 빠져있었고, 싸우던 도중에 도망가는 말그대로의 당나라군이었습니다. 이러한 군대를 매소성에서 격파한 신라는 다시 대동강까지 진격했고, 그후 신라군들은 당나라 군대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나라 군대가 형편없고 엉망이라는 이미지를 가지는건 중국, 일본, 우리나라 중에 우리나라에서만 입니다. 당사자인 중국인들은 당나라 군대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우리나라가 쓰는 표현을 아마 이해못할거라 생각됩니다. 실제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격파해본적이 있을 정도로 강력했던 당나라 군대, 그런데 이런 군대가 이런 이미지가 되어버렸으니, 마지막에 당나라 군대와 싸웠던 신라군이 본 당나라 군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정말 상상이 되지 않을정도로 엉망이었을까요? ㅋ 얼마나 강렬한 기억이길래 1500년이 지난 후손들도 관용구처럼 그런 표현을쓰고 있을까요 ^^ 정말 타임머신이 있다면 돌아가서 보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