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잡다한 역사이야기 6편 - 사마천의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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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역사이야기 6번째 동양의 역사저술의 한획을 그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사기 이전의 역사서
사마천의 사기는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전 저술이긴 하지만 그 전에도 역사책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제일 유명한건 공자가 저술한 춘추인데요. 노나라의 역사서이긴 하지만 공자의 저술로 사서오경에 들어가는 책입니다. 봄과 가을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1년을 나타내는데요. 이렇듯 처음의 역사서는 몇년에 무슨일이 있었다. 그리고 몇년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다 하는 식의 편년체로 기록됩니다.
혁명적 서술 기전체
그러나 한나라 사람 사마천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합니다. 일단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본기, 편년체로 기록한 표, 각종 제도나 당시 생활상과 풍속들을 기록한 서, 제후와 왕족들의 이야기 세가,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을 다루는 열전 이렇게 나누어서 기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본기와 열전, 세가와 본기 등등에서 같은 사건도 다양한 각도에서 기록을 할수 있었지요. 그후 이 기전체는 동양쪽 역사 기술의 표준이 됩니다.
우리가 아는 삼국사기도 이런 기전체로 쓰였고요. 정사 삼국지도 기전체로 쓰였습니다.
사마천의 불행한 일생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대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직을 역임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많은 역사기록을 접했고, 관직에 나가기전 10~20대의 기간동안 당시 중국을 여행하며 역사적인 사건이 있던 곳을 직접 방문하며 역사적인 이야기를 전해듣는데 힘썼다고 합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천문과 역술등의 학문을 연구하는 직책인 태사령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무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의식인 봉선 의식을 거행할때 자신도 참여할수 있을거라 생각해 들떠있다가 막상 아래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자 실의에 빠져 몸져눕고 결국 자신이 저술하던 역사서의 완성을 아들 사마천에게 부탁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후 사마천은 이 역사서의 완성에 모든것을 걸게 되고 이게 사기의로 이어집니다.
한편 아버지의 관직인 태사령을 물려받아 관직으로 나선 사마천은 열심히 역사서 저술에 힘쓰게 됩니다만 불행한 사건이 그를 덮칩니다. 당시 한나라 무제는 북방의 유목민족 흉노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병 5천으로 열심히 싸우다 흉노에게 포위당한 후 항복한 이릉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당시 한무제는 불같이 화를 냈고, 대부분의 신하들이 한무제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으나, 사마천만은 용감하게 이릉을 변호했고, 결국 한무제의 분노를 사 사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감옥에 갇힌 사마천은 절망하게 됩니다. 아직 역사서가 완성되기 전이었는데, 꼼짝없이 죽게 생겼으니 말이죠. 그러나 당시 한나라의 법에는 목숨을 건질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돈을 내서 죗값을 대신하는 방법이 있었죠. 그러나 사마천은 가난했고, 어마어마한 액수의 금액을 모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이 있었는데요. 바로 고자가 되는 궁형이었습니다.
사마천은 결국 궁형을 선택하여 목숨을 건졌고, 그후 끝끝내 사기를 완성하게 됩니다.
사마천의 관점이 담긴 책
그렇게 완성시킨 책이라서 그럴까요? 지금봐도 아주 획기적인 구성으로 되어있습니다. 처음 선보이는 기전체도 기전체이지만 사마천이 역사를 바라보는 혁명적 관점이 그대로 녹아들어있습니다.
먼저 본기를 살펴보면 하-은-주-진-한으로 이어지는 정통왕조의 흐름속에 무려 유방의 라이벌 항우의 기록으 들어가 있습니다. 항우를 유방과 동격으로 놓아 항우본기가 적혀져 있습니다.
항우와 우희의 로맨스를 담은 패왕별희입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민주주의에 표현의 자유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무려 2000년전 왕조시대에 왕국을 만든 사람의 라이벌이 동격으로 들어가 있다니 ㅎㄷㄷ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만일 항우를 제후를 다루는 세가급으로 낮추거나 열전까지 내려버리면, 항우에게 맨날 당하던 유방을 깎아내리는 서술로 볼수도 있으니 오히려 항우를 본기에 기록하여 그를 최대한 높여주고 끝끝내 그를 꺾은 유방을 높이는 기술이라고도 할수 있지요. 그러나 그 다음은 더 대단합니다.
유방의 부인이자 대단했던 여걸 여태후
유방의 기록인 고조본기 까지는 괜찮지만 그 뒤를 이은 혜제와 두명의 소제 시절을 혜제본기, 소제본기 이런식으로 기록하지 않고, 그 당시 실권을 장악했던 여태후의 이름을 그대로 쓴 여태후본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태후가 당시에는 거의 황제처럼 권력을 휘둘렀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아예 제목을 여태후본기라고 기록했으니 역사를 바라보는 사마천의 관점을 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지금처럼 여성의 권리가 신장된 시절도 아니고 2000년전의 기록이라는걸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꼭두각시 황제들은 아예 제대로 본기조차 없으니 사마천의 관점도 관점이지만, 이걸 그대로 내버려둔 한나라도 어찌보면 대단하네요.
그후 세가로 넘어가서 보면 춘추전국시대 존재했던 왕국과 한나라의 개국공신들, 그리고 유명했던 왕과 그의 자손들의 기록이 쭉이어집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또 사마천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담긴 두 책이 등장하니 바로 공자세가와 진섭세가입니다.
동양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공자
유교의 창시자이자 후대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공자를 왕이나 제후급으로 올린것은 얼핏 이해할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진섭은 누구일까요? 바로 진나라 시절 반란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의 기록입니다. 진승과 오광은 원래 일꾼들을 감독하는 감독관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진나라의 공사에 참여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끌고 길을 가던중에 비가 많이와서 강물이 불어나 약속된 기한까지 공사현장에 갈수 없게됩니다. 당시 진나라 법에 약속된 기한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사형이었죠. 결국 진승과 오광은 반란을 일으켜서 진나라에 대항했지만 결국 진나라의 군대에 진압되어 최후를 맞이하지요. 그런 그들을 사마천은 어떤 생각으로 세가에 기록해 두었을까요?
이렇듯 곳곳에서 사마천이 바라본 관점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열전에서도 사마천이 당시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생각했나 볼수 있는 열전이 두개 존재합니다. 바로 유협열전과 자객열전입니다. 유협은 사람이름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깡패, 조폭정도라고 할수 있겠네요. 조폭의 일화를 담은 역사서입니다. ^^; 물론 나름 의리를 갖추고 품격이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의 일화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나라의 정식역사서에 조폭과 깡패의 계보(?)를 담다니 참 재미있죠. 그리고 자객열전은 말그대로 자객, 즉 암살범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암살범들의 기록이라니 ㄷㄷㄷ 거기에 사마천은 나름 미화를 해서 기록해 두었지요. 의리와 비장한 각오를 담아 암살을 시도했던 자객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과연 사마천은 이들을 어떻게 생각했던것일까요?
이렇듯 사마천의 사기에는 지금 우리가 봐도 ㅎㄷㄷ한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전제왕조국가에서 왕들을 깎아내리는 기록도 거침없이 기록되어있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것 같은 밑바닥의 생활상도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사마천의 사기는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