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어느 영부인의 일생

1997년 11월 24일 어느 영부인의 일생

한글을 읽을 줄 알고 정규 교육과정을 대충이라도 이수한 사람들이라면 대개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이름을 꿸 수 있다. 지금 대통령이 17대이긴 하지만 워낙 이승만과 박정희 두 양반이 몇 대씩 자리를 차고앉았던 만큼 실상 대한민국 대통령 수는 10명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 신문깨나 보고 낫살이나 먹은 사람들이라면 그 부인들의 존함까지도 댈 수 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여사, 품위 넘치는 '영부인'의 전형이자 청와대 내의 야당으로서 가끔 박씨 성 가진 남편과 '육박전'을 벌이기도 하셨다는 육영수 여사, "내 남편을 보면 링컨이 생각이 나요."라는 세기의 농담 (본인에게는 진담이셨겠으나)으로 국민들을 웃기셨던 이순자 여사, 조용했던 것 같지만 베갯머리 송사에 능했다는 전설이 서린 김옥숙 여사, 아들 김현철이 구속될 때 말고는 대통령에게 정치적인 부탁을 한 적이 없다고 전해지는 손명순 여사, 좋은 아내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남편의 평생의 동지에 더 가까웠던 이희호 여사, "대통령이 되기 위해 마누라를 버리란 말이냐?"는 남편의 연설에 눈물 흘렸던 ‘빨갱이의 딸’ 권양숙 여사, 그리고 국기에 대한 맹세할 때 왼손을 오른쪽 가슴에 대는 파격을 선보이셨던 김윤옥 여사까지. 그런데 대충 다 든 것 같지만 두 명이 빠져 있다. 최규하 대통령의 부인 홍기 여사와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가 그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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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들이 임기를 채우지도 못하고 1년 아니면 몇 달만에 군인들의 등쌀에 밀려났기에 부인들의 존재감도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지만,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의 일생은 그렇게 잠시 스쳐 지나갔던 영부인의 하나로 기억하기에는 결코 녹녹지 않은 역사를 휘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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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신학자였다.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의 눈에 거슬려 투옥당하고 고문을 받은 적도 있는 당찬 여성이었고, 해방 후에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에 유학을 갈 꿈에 부푼 학구파였다. 훤칠한 키에 피아노, 수영 등 못하는 게 없어서 ‘만 가지 약장수’라는 별명까지 있던 그녀의 꿈은 ‘인도 선교사’였다. 즉 결혼 따위는 애시당초 그녀의 뜻 밖에 있었다. 그런데 애를 둘 씩이나 둔, 열 네 살 씩이나 연상의 홀아비가 그 앞길을 막는다. 초대 서울시장 윤보선이었다.

공덕귀는 애초에 결혼할 마음이 없었던지라 윤씨 가문에서 보내오는 매파를 매번 물리쳤는데 그녀의 후원자 노릇을 하던 목사가 유학 자금을 들고 잠적하는 사태를 만난다. 목사는 공덕귀가 미국 유학을 떠나는 것보다 윤보선의 아내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지금도 안국동 정독도서관을 가는 길목에 좌정하고 있는 윤보선 가의 아흔아홉간 기와집은 그녀에게 일종의 귀양처와 같았다. 활달하게 걷던 걸음걸이마저 조신조신하게 교정을 당했다고 하니 알만하다. 그래도 남편 사랑 받으며 아들 둘 낳고 삶을 채워가던 그녀는 남편의 지위에 따라 별안간 '영부인'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남편이 정치인이었지만 유세현장 한 번 나가 본 일이 없었고, 관저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안국동 집에서 살면 안되냐고 물을 정도였다. 윤보선 대통령 시절 내내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기도밖에 없었다. 스스로 "조롱 안의 새"라고 표현한 시절.

하지만 '공덕귀 여사'의 이름이 빛을 발한 것은 오히려 남편이 대통령의 직을 잃은 뒤였다. 특히 남편이 현역 야당 지도자의 자리에서도 은퇴한 후에야 공덕귀 여사는 그야말로 독수리처럼 날기 시작했다. 온 나라가 얼어붙은 유신 이후 1974년 5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초대 인권위원장 자리를 맡으면서부터 공 여사는 영부인 출신의 민주투사로 자리잡는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윤 전 대통령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자 이를 계기로 여사는 ‘구속자 가족 협의회’ 회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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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가 공덕귀 여사

이후 공덕귀 여사는 가장 위험한 시위 현장을 골라 돌아다녔다. 그것은 그래도 왕년의 '대통령 영부인'을 함부로 다루기는 쉽지 않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맨 앞에 서서 경찰의 방패를 가로막았고 휘두르는 몽둥이 앞에 머리를 디밀었다. 그녀가 생전에 가장 가슴 아파했던 사건은 인혁당 사건이었다. 대법원 판결 하루 만에 8명의 목을 매달아 버리고 시신조차 내주지 않은 콜로세움같은 야만의 현장에 분노한 그녀는 동토의 공화국 곳곳을 뛰어다니고 호소하고 울부짖고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다. 급기야 대통령 영부인이라고 피해 가지 않는 험악한 욕설과 발길질 앞에서도 공덕귀 여사는 한결같이 거리에 나왔다.

하루는 단 8명의 여자만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데 갑자기 후배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공덕귀 여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지나는) 버스 탄 사람들이 나더러 뭐라 그럴까."

아마 여사도 자신의 일생을 종잡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망한 나라의 군인의 딸로 태어나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의 고통을 눈으로 보고 자랐고, 가난한 전도자의 아내가 되었다가 궁핍 속에 죽어간 언니를 앞서 보내야 했고, 오랫 동안 키워온 신학자의 꿈에 부풀던 중 갑자기 아흔아홉간 대갓집의 맏며느리가 되어 대통령 영부인까지 올랐던 사람, 그리고 늘그막에는 젊었을 때 자신이 함께 하리라 맹세했던 낮은 자들, 고통 받는 이들의 편에서 거리에 서야 했던 그녀는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뭐라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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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마지막 혼돈은 남편으로부터 왔다. 광주 항쟁을 거친 후 집권한 전두환은 온갖 감언이설로 윤보선을 꼬드겼고, 노욕이 들었던지 치매가 왔던지 윤보선은 덥석 그 말에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공덕귀는 두 아들과 합동으로 "제발 가만히 계시라."고 말렸지만 여든 노인 윤보선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강원룡 목사가 자서전에서 자조적으로 언급한 바 "시대의 변절자 윤천지강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룡- 유신 시절 그렇게 용감하다가 5공 이후 기묘하게 변했던 이들)"의 선봉이 된 남편 때문에 그녀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민주화운동의 동료들이 제 집처럼 드나들던 안국동 집을 멀리 하고 발을 끊게 된 것이다. 아마 그녀는 그즈음에도 “대체 사람들이 나더러 뭐라고 할까.”라고 독백하지 않았을까.

1997년 11월 24일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여사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탄식하며 말년을 보냈다 한다. 그러나 사람이 꼭 무엇을 이루어야만 잘 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어울리는 퍼스트 레이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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