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추억의 율 브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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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0월 10일 최고의 멋쟁이 대머리 율 브리너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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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가을의 어느 날, 고딩 초년생으로 모처럼 여유롭게 TV를 보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랐다. 무척 낯익은 배우가 병색이 완연하다 못해 해골을 보는 느낌을 뿌리며 등장한 것이다. 낯이 익었다기보다는 그 인상이 너무나 뚜렷했다는 편이 맞겠다. 대머리 배우 하면 떠오르는 남자, 율 브리너였다.
그는 TV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든지 좋지만 담배만은 제발 피우지 마세요. 여러분이 지금 이 광고를 보고 있을 때 저는 이미 폐암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초췌한 얼굴과 힘겹게 열리는 입술, 나는 그때 바로 몇 달 전 명화극장에서 방송했던 "왕과 나"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영국인 가정교사와 내밀한 사랑을 키우지만 끝내 고백 한 번 못해 보고 마지막까지도 "왜 당신 머리가 내 머리보다 높아?"라고 윽박지르는 샴의 왕 몽쿳이 죽어가는 모습 말이다.
지금까지도 숭앙되는 태국의 명군이 되는 출라롱콘 황태자가 1개 소대급의 왕자와 공주 형제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들으며 샴의 왕은 서서히 몸을 눕혔고 이윽고 손이 툭 하고 떨어지면서 죽음을 맞는다. 신하 한 명이 그 앞에 꿇어 엎드리고 왕 곂으로 영국인 가정교사 안나가 몸을 숙이던 라스트 신에 "담배만은 피우지 마세요."라며 사신(死神)이 잔뜩 들어찬 얼굴로 호소하는 율 브리너가 오버랩된 순간 나는 배울까 말까 망설이던 담배의 유혹을 저만치 던져 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율 브리너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명화극장 키드에게 그것은 하나의 작은 세상의 소멸이었다.
그 특이한 음성 (명화극장에서는 성우 박상일씨가 전담했다)과 강렬한 눈빛, 겉은 거칠지만 속은 부드러운 역할을 즐겨 맡았던 그가 출연한 영화가 명화극장이나 주말의 명화에 출현하면 나는 기어코N'닥본사'를 했었다.
그를 스타로 만들었던 유명한 태국의 왕 (왕과 나)으로부터, 빈틈없는 황야의 총잡이(황야의 7인), 호색한의 피가 흐르는 카라마조프 형제의 맏이(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상투 튼 카자흐 용사(대장 부리바)에다가 강퍅한 파라오(십계)에다가 다윗의 아들 현자 솔로몬 역(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그리고N'왕과 나'의 여배우 데보라 카와 또 만나서 비련의 사랑을 키워 가다가 먼저 죽는 러시아 장교 역이었던 영화N'여로'에 이르기까지 그는 대륙과 인종의 벽을 넘어 무지하게 다양한 배역을 소화한다.
그가 어느 대륙 어느 민족의 배역을 맡아도 별로 어색하지 않았던 것은 몽골계 스위스인이었던 아버지(친할머니가 몽골인이라는데 분명치는 않단다.)와 유태계 러시아인 어머니 (루마니아 집시라는 말도 있다!) 사이에서 태어난 덕일 것이다. 즉 혼혈이 겹겹이 된 집안에서 율 브리너라는 신비가 태어난 것이다. 그의 초년 시절은 그리 유복하지는 않았다. 학교 교육 따위는 거리가 멀었고, 파리에서는 공중 곡예단 노릇을 하기도 했다. 미국에 건너가서 연기 수업을 받고 뮤지컬N'왕과 나'에 캐스팅되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의 전환을 맞고 일세를 풍미한 명배우로서 커리어를 쌓아나가게 된다.
그런데 그는 한국을 무척 그리워하는 외국인 중의 하나였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 7살 때 하얼삔으로 이사해서 살았고 이후 일제 하 조선에서 벌목업과 숙박업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따라 자주 조선의 함경도 지방을 방문했다. 특히 여름은 거의 조선에서 보내어 집안에서는 "여름 조선인"(써머 코리안 보이)으로 불리우기까지 했다니 보통 인연이 아닌 셈이다. 그의 사진 중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선 호랑이 사냥에 나선 모습도 있다. 바로 아래 사진이다. 율 브리너의 아들에 따르면 그는 극동 지역에 향수를 지니고 살았다고 한다. 물론 조선인으로서는 벌목과 광산으로 돈 벌어가는 양코배기가 그렇게 탐탁지는 않았겠지만.
1985년 10월 10일 대머리 명배우는 담배 피우지 말라는 호소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동서양이 조화롭게 들어 있던 그의 얼굴은 스크린으로만 남았고, 그의 허다한 출연작들은 먼지가 많이 쌓인 추억의 명화 반열에 든 지 오래다. 그의 기일, 어릴 적 지켜봤던 그의 모든 모습들이 슬라이드로 스쳐 지나간다. 그는 참 멋진 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