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돈이 사악해지기까지 |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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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절정으로 치닫자 아테네는 금화와 은화가 부족했다.

궁지에 몰린 아테네는 급기야 금화에 동을 섞기로 결정하는 악수를 둔다. 금화 1만 개가 세금으로 들어오면 이것을 녹여 동과 섞은 다음 금화 2만 개를 만들어내는 식이었다. 이는 아마도 우리가 아는 한 최초의 재정적자지출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금화에 동이 섞여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시민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자신들이 가진 금화에 동이 섞여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게다가 잠시 휴전에 들어간 때에도 아테네에서는 인프라 건설이 한창이었다.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신전을 지어댔는데, 인프라 공사에 투입되는 화폐는 시민들을 기만한 화폐였다. 시중에 금 함유율이 떨어지는 악화가 풀리기 시작하고, 이를 시민들이 알아차린 순간부터 점점 원래의 금화는 시중에 돌지 않게 되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금이 제대로 함유된 화폐를 가진 사람은 이 화폐를 사용하지 않았고, 동이 섞인 화폐만을 사용하여 나쁜 돈이 좋은 돈을 시장에서 몰아낸 것이다. 유명한 그레셤의 법칙이 나타난 아테네에서는 결국 시장에 동화만이 남게 된다.



동화만이 남게 된 시장에서 금화를 얻으려면 많은 동화가 있어야만 했고, 이때 처음으로 금과 은에 값이 매겨지게 되었다. 그전까지 금과 은은 무게로 그 가치를 메겨왔었다. 금화를 구하기 위한 동화의 개수는 계속 늘어만 갔고, 결국 인류 역사상 첫 번째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이곳 아테네에서 일어났다. 주머니 속의 동화가 나날이 가치가 떨어졌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동화를 소유한 사람들의 구매력은 떨어져만 갔다. 대제국 페르시아를 막아냈던 그리스의 눈부신 경제력은 점점 그 위상을 잃고 나락으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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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드 제국부터,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고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보자면, 번영과 전성기를 구가하던 국가와 제국들이 하나같이 그 정점에서 급격히 몰락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어 그 후로도 세계의 패권을 가져간 제국들은 대동소이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 반복되는 역사에서 우리는 제국의 7단계를 확인할 수 있다.



리드미컬하게 좌우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의 추를 사회의 추라고 생각해보자. 이 추는 가치 있는 돈에서 다량의 화폐 사이를 계속해서 왕복한다. 이 과정에 항상 7단계가 존재하며 7단계의 끝에서 항상 가치 없는 화폐는 금에 의해 종말을 맞았다.


1단계,
국가는 가치 있는 돈으로 출발한다. 금화 은화 또는 금은에 기초한 화폐가 가치 있는 돈이다.

2단계,
사회와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계속해서 공공 인프라를 건설하며 경제적 부담이 가중된다.

3단계,
경제적 부가 상승함에 따라 정치적 영향력도 커진다. 따라서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운용해야 할 필요성과 그 비용이 증가한다.

4단계,
결국 그 군대를 실제로 동원하게 되면서 지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5단계,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국민들의 부를 빼앗는다. 아테네의 예처럼 악화를 만들어 내거나, 무한으로 찍어낼 수 있는 화폐를 만들어낸다.

6단계,
화폐의 가치가 떨어진 것을 국민 또는 시장이 눈치채며 화폐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7단계,
엄청난 부의 이동이 화폐에서 금과 은 또는 다른 가치 있는 것들을 향해 일어난다.



이 7단계에 이르면 화폐는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엄청난 양의 화폐를 소화하기 위해 가치 있는 물건, 대표적으로 금값이 폭등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부라고 말하는 것은 사라지는 법이 없다. 다만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이동할 뿐이며 이 과정에서 화폐는 사라지고 돈은 살아남는다. 화폐와 돈은 그 성격이 거의 비슷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화폐는 긴 시간 동안 가치를 유지하기 힘들지만, 돈은 오랜 세월에 걸쳐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결정적 차이를 이해하고 부가 이동하는 길목에서 끊임없이 부를 축적해 온 나라는 없었다.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하면 유일하게 유태인이 있을까. 하지만 이스라엘 왕국 멸망 이후 대규모 자본을 투자할 일이 없었던 유태인은 넓은 지역에 걸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제국들과는 그 운명 자체가 달랐다. 아니면 제국이라는 존재의 운명을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인사이트가 있었기에 국가라는 실체 없이 2천 년을 떠돌아다녔을지도 모를 일이다.



화폐의 붕괴는 중산층을 제거한다.
경제라는 모터가 돌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동력을 제공하는 계층이 중산층이기에, 건전한 권력은 중산층이 굳건할 때 건전한 지지를 받아 비로소 빛을 발한다. 하지만 이 중산층이 붕괴하게 된다면 권력은 독점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리고 곧, 한 곳에 집중된 권력은 부의 이동 경로를 따라 다른 곳으로 통째로 이동하게 된다. 그렇게 제국들의 흥망성쇠가 이어져 왔고, 20세기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번영은 개인의 자유와, 자유 시장 그리고 양화가 있을 때만 인류의 곁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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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치, 희소성, 합의 그리고 믿음
#2 아름다움
#3 환경
#4 누비아의 금
#5 일렉트럼 : Electrum
#6 믿음을 강요하는 화폐 I
#7 믿음을 강요하는 화폐 II
#8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 I
#9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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