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세 번의 9.11

9년1973년 2001년 세 번의 9.11

서력 기원이 시작된 얼마 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라인강에 위치하던 로마 제국의 국경을 동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엘베 강으로 옮길 계획을 세운다. 영토적 야심 뿐만 아니라, 엘베 강과 다뉴브 강을 잇는 국경선이 라인강과 다뉴브를 연결하는 국경선에 비해 훨씬 짧으므로 수비에 용이하다는 전략적 판단에 기인한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두 양자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는 성공적으로 정복전을 수행하여 로마군단의 독수리기를 엘베 강변에 꽂는데 성공한다.

이 새로운 영토를 다스릴 자로 아우구스투스가 선정한 인물이 퀸틸리우스 바루스. 그는 시리아 총독으로 있던 당시 반란이 일어난 유대 지역을 평정하면서 유대인 2000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버린 것으로 그 악명이 자자했다. 그런데 바루스와 아우구스투스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로마의 정복은 큰 강 유역과 그들을 잇는 지역에 국한되었을 뿐, ‘게르만의 어머니’라 불리우는 광활한 숲지대는 발도 못디뎌 보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바루스는 이곳에 부임하기 전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의 하나였던 시리아의 총독이었다. 바루스는 자신이 익숙한 방식대로 금을 세금으로 바칠 것을 명령했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의 하나였던 게르만 사회는 혼란과 불만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이 틈을 노려 반란을 선동한 것이 헤르만, 라틴어로는 아르미니우스라는 젊은 부족장이었다. 그는 로마군에 복무하여 시민권은 물론 기사 계급까지 올라간 ‘로마화’된 인물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인정했고 바루스도 그를 믿었다. 하지만 그는 그 신뢰의 뒤에서 차근차근 제국의 발밑을 파고 있었다.

토이토부르크.jpg

서기 9년 9월 헤르만의 꾐에 빠진 바루스는 휘하 3개 군단을 이끌고 낮에도 해가 보이지 않는 토이토부르거의 숲으로 행군해 들어갔고, 좁은 숲길에서 헤르만이 이끄는 게르만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다. 첫날은 노련한 로마군의 수비가 먹혀들어갔으나 둘째날 천둥과 벼락과 폭우가 토이토부르거 숲을 강타하는 가운데 기후에 익숙지 못한 로마군은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셋째날 9월 11일 3개 군단은 전멸한다. 바루스는 포로가 되기 직전 자살했고 다른 지휘관들도 칼을 가슴에 대고 엎어졌다. 사로잡힌 병사들은 나무에 못 박혀 게르만의 신에 바쳐지는 산제물이 되었고, 로마군 7,8,9군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소식에 “바루스! 내 3개 군단을 돌려 다오.”라고 벽에 머리를 쿵쿵대고 짓찧었다. 로마판 9.11 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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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헤르만은 게르만족의 단결을 호소하며 로마 제국과 끈질기게 맞섰고, 몇 번씩이나 로마 제국군에게 참패를 안겨 주었지만 로마제국 쪽에 붙은 동족과의 내분 끝에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로마 제국에 맞선 게르만의 자유혼의 상징으로서 문학 작품이나 연극 속의 주인공으로 곧잘 부활했다. 독일 작가 클라이스트가 쓴 “헤르만의 전쟁”에 등장한 헤르만은 이렇게 절규한다. “폭풍은 숲 사이로 미친 듯이 불며 ‘봉기하라!’고 외칠 것이며, 바다는 방파제를 때리며 ‘자유!’를 울부짖을 것이다.” 헤르만의 저항으로 로마제국은 라인과 엘베 강 사이의 광활한 땅에 대한 욕심을 영구히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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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964년 뒤인 1973년 9월 11일에는 . 20세기의 로마 제국과 그 힘을 숭배하는 동족들이 한 건물을 완전히 포위하고 20세기의 헤르만에게 항복을 종용하고 있었다. 공간적 배경은 지구의 반대편 칠레의 산티아고. 칠레 제 29대 대통령이자 지구 역사상 최로로 선거로 집권한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미국의 사주를 받은 쿠데타 군에 포위된 채 최후의 항전을 다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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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기동하는 사회주의 정당을 꿈꾸며 1932년 사회당 창당을 주도했고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칠레 공산당 후보이자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양보를 받아 ‘진보진영 단일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그였다. 미국과 다국적 기업들의 눈의 가시였던 그는 국내 기득권층의 저항으로도 크나큰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 신임투표를 카드로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했다. 9월 11일은 신임투표 계획을 발표하려던 날이었으나 20세기의 로마 제국의 하수인이자 아옌데의 동족들은 그럴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육해공군 및 경찰까지 합류한 쿠데타 부대가 대통령궁을 공격했고 아옌데는 친구 카스트로가 선물한 소총을 들고 싸우다 사살(또는 자살)당한다. 제국에 맞서 자신의 동포들에게 더 넓은 자유와 행복을 선물하려던 한 용감한 이의 쥐어짜는 듯한 마지막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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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옌데의 마지막 모습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다니게 될 것이고,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베트남이라는 20세기의 토이토부르거에서 만신창이가 된 미국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앞마당 라틴 아메리카의 자유를 짓밟고 20세기의 헤르만 하나 없애는 것은 전혀 수고로운 일이 아니었다. 구리의 국제 가격을 폭락시켜 광산 국유화를 단행한 아옌데의 숨통을 죈 것도 미국이었고, 쿠데타날 칠레의 각 항구에는 미국 함대가 포신을 번득이고 있었다. 쿠데타 1주일 전 밀 30만톤을 긴급히 판매해 달라는 칠레의 요청을 간단히 무시했던 미국은 아옌데가 죽어나오자마자 2450만 달러어치의 밀을 칠레에 외상으로 판매하도록 승인한다. 제국은 강력한 만큼 비열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난 흉터를 지우느라 한동안 와신상담하던 제국은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한다. 냉전 시기 신경 쓰이던 라이벌이 사라진 이상,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던 제국에 또 한 번의 9월 11일이 찾아든다. 2001년 9월 11일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탈취한 비행기가 뉴욕 상공에 날아들어 쌍둥이 빌딩에 전속력으로 부딪친다. 쌍둥이 빌딩은 검은 연기를 토하며 무너졌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자신의 앞마당에서 일어난 ‘공격’이었다. 그리고 20세기의 로마 제국은 잔인한 복수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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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 학살 무기가 ‘무조건 있다’는 이유로 한 나라를 쑥밭으로 만들었고, 2001년 공격의 주도자가 숨어 있다는 이유로 다른 한 나라를 초토화시켰다. 수년간 수십억 달러를 허공에 날린 끝에 쌍둥이 빌딩 테러의 범인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고 인도양 깊숙한 곳으로 떨어뜨렸지만 이로써 전쟁이 마무리되리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제국의 압제는 항상 ‘미친 듯한 봉기’와 ‘파도 같은 자유의 외침’을 불러 왔었고, “무력으로는 변화에 대한 꿈을 멈추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 속 9월 11일은 제국의 성공과 실패, 압제와 저항의 파노라마가 묘하게 맞물려 펼쳐졌던 날이었다. (덧붙이자면 오사마 빈 라덴은 미친 넘이었고, 그런 저항은 오히려 그 스스로를 망치는 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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