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통행금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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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7일 통금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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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은 걷잡을 수 없는 기쁨이었지만 종잡을 수 없는 혼란의 시작이기도 했다. 일본이라는 수십년 동안의 절대적인 지배자가N'덴노 헤이까'의 어눌한 항복 선언 하나로 종이 호랑이가 된 뒤 누가 과연 그 무주공간의 정국의 주도권을 쥘 것인지에 관해서는 의견도 분분했고 움직임도 기민했다.N'인민공화국'이 성립하여 각지에 인민위원회 등 자치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상해 임시정부도 귀국을 서둘렀으며 친일파 노릇을 했던 이들도 기가 죽은 가운데 암중모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들어왔고 이남에는 미군이 들어오기로 한 이상, 모든 것은 인천에 상륙하는 미군에 달려 있었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인천 부두에 달려가N'해방군'을 맞이하고 1백만 서울 시민이 열광적으로 미국을 환영하는 데에는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함과 막연한 기대감이 내재되어 있었다. 미군은 그 어정쩡함을 확고하게 불식시켜 주었다. 임시정부고 인공이고 모든 형태의 자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 관리들의 계속 복무를 명령했으며, 미 군정 시의 공용어는 영어로 한다고 선언했다. 즉 "38선 이남의 권력은 우리에게서만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내린 많은 명령 가운데 하나가 1945년 9월 7일 발표되고 8일부터 시행된 통행금지령이었다. 치안 유지를 이유로 미군 측은 서울과 인천 지역에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의 통행을 금지했다. 하지 중장 이하 분위기를 알 수 없는 점령지에 상륙하는 미군 장교 들이 별 생각 없이 내렸을 이 통행금지 포고령은 그대로 37년간 한국의 전통(?)이자 관행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전쟁을 겪으면서 통행금지는 전국으로 확대됐고 대략 12시에서 4시까지 4시간은 일종의 압수된 시간으로 한국인의 생활을 규정한 것이다.
통금 시간이 들쭉날쭉한 적은 있었지만 통금 제도 자체가 폐지된 적은 없었다. 4.19 때 계엄령이 떨어진 이후에는 통행금지 시간이 오후 7시였다. 1979년의 부마항쟁 때 부산 일원에는 10시 통금령이 떨어졌다. 필자의 가족 모두가 어딜 다녀 오다가 별안간 통금이 10시라는 말을 듣고 걸음아 날 살려라 골목을 내달리던 기억 생생하다. 그 37년간 한국인들은 너무도 통금을N'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하나의 문화로 정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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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속전속결 술자리도 아마도 통금 때문이지 싶다. 퇴근하고 술자리에 둘러앉으면 7-8시인데 냅다 빨리들 먹고 취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자니 술잔을 돌리면 제꺽 술잔이 돌아와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맥주에 양주를 들이부어N'폭탄'을 제조하는 병기창이 항상 성황이지 않았을까. 37년 뒤 전두환 정권의 선심쓰기로 역사 속으로 통금이 사라질 때 유력한 반대의 목소리 하나가 "남편들 술자리가 길어질 것"을 우려하는 주부들의 것이었으니 그 분위기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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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그때부터 거리는 무인지경이 됐다. 방범대원과 경찰이 순찰을 돌다가 통금 위반자를 발견하면 불문곡직 파출소로 끌고 가서 유치장에 처넣었다. 꽤 큰 트럭이 돌아다니면서 위반자들을 짐칸에 쓸어 담기도 했다. 상갓집에 갔다거나 병원에 가야 한다거나 등등 모든 핑계가 통하지 않았고 4시까지 꼼짝없이 창살 안에 앉아 있다가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내고 나와야 했다. "통금 위반으로 벌금" 이란 요즘의 향군법 위반만큼이나 흔한N'범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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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삼엄한 통행금지로부터 예외가 되는 날이 있었다.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와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12월 31일이었다. 이 연말연시의 이틀간 도심 거리는 사람들의 발길로 메워지는 정도가 아니라 미어 터졌다. 젊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꼬꼬마들 손 잡은 부모들까지 새벽 1시 2시의 밤거리를 쏘다니며 해방감을 누렸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집들이라도 아이들이 밤새 동네를 부르며 다니는 새벽송을 관대히 받아들였다. 서양의 명절임에 분명한 크리스마스가 한국 사람들이 붕붕 떠다니게 만든 데에는 그날이 수십년 간 "1년에 딱 두 번"의N'24시간의 하루'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 추억들의 방울방울이 어디 이만저만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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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무려 37년만에 통금은 철폐됐다. 하루에 네 시간씩 꼬박꼬박 관에 압수당해야 했던 시절은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와 경찰관의 욕설 그리고 유치장에 내동댕이쳐졌던 젊은이들의 치기와 취객들의 아우성과 더불어 사라졌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12시에 귀가하지 않으면 경찰이 뒷덜미를 채 갔던 세상을 도무지 상상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은 엄존했고 그를 경험한 이들은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흘낏 머리 깊숙히 묻혀 있던 추억 몇 자락을 꺼내며 미소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