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모든 아름다움은 폐허로 향한다 - <앙코르인문기행>

#산하의오책

<앙코르 인문기행>
모든 아름다움은 폐허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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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앙코르와트 가 봤나? 안 가 봤으면 가능한 빨리 다녀와라.” 이유는 10년 뒤 앙코르와트가 어떻게 돼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12세기 초 전성기를 누리던 크메르제국의 수르야바르만 2세의 걸작품이자 캄보디아를 넘어 인류 전체의 문화 유산이며 반동분자들이랍시고 자국 인구 수백만을 죽여 없앨 만큼 순결한(?) 공산주의자들 크메르 루즈조차 그 국기 중앙에 박았던 경외의 대상인 앙코르와트이지만 그 형편없는 관리와 관광객들의 끝없는 발길에 멍들고 깎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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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새겨진 어느 볼륨감 넘치는 여신 조각상의 경우 그 가슴팍이 새까맸다. 오대양 육대주의 흑백황인종들의 손때가 골고루 묻은 탓이다. 우리로 치면 석굴암 관음보살상 가슴팍이 손때로 뭉개지는 격이니 이 얼마나 황망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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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가 새겨진 벽들에 사람들이 접근하면 관리인들이 호각을 불어대긴 하지만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손으로 어루만질 수 있고 콧김을 불어넣을 만큼 가까이에서 조각상을 감상할 수 있었다. 두터운 유리 밖에서만 그것도 먼발치에서 바라봐야 하는 석굴암을 생각하면 관리의 허술함에 한숨을 쉬다가도 또 인류사의 걸작을 지근거리에서 들여다볼 기회가 흔하랴 싶어 “앙코르와트에 어서 다녀오라”고 권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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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앞으로 권할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앙코르와트에 가려면 이 책을 들고 가라.”고 말이다. 이 책은 <앙코르 인문 기행> (장 쉰 지음, 박지민 옮김, 펄북스)이다. 과문한 탓에 장쉰의 명성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으나 대만 쪽에 정통한 친구에게 물었을 때 대번 “무식한 놈 장쉰을 모르다니!” 하는 타박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대만의 문화적 지주’라는데 이 책은 앙코르와트를 비롯, 캄보디아의 옛 수도 곳곳에 널려 있는 크메르 제국의 유적들을 둘러보고 쓴 여행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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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밍’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인지라 그 살가움과 생생함이 더한 이 기행문은 단 하루, 그야말로 주마간산으로 앙코르와트의 거죽에 혀 끝만 대고 돌아온 패키지 여행 경험자. 그래도 갔다 왔답시고 “어서들 가 봐.”라고 권하는 얼치기 답사객의 얼굴을 벌겋게 달구기에 충분하다. 앙코르와트와 바이욘사원, 타프롬 사원 정도를 뚝뚝이 타고 돌아다니며 가이드의 외침에 양떼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던 기억이 전부인데 그곳을 그렇게 다녀갔던 것이 얼마나 아쉽고 또 아쉬운 일이었는지를 깨달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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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톰, 프라사트크바라반, 닉포안, 룰루오스 유적, 반테아스레이 등등 어슴푸레 기억나거나 아예 생소한 유적들이 내 패키지 여행 코스 주변에 널려 있었던 것을 잘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실에 얼마나 머리 한쪽이 가려운지. 그리고 무심히 지나쳤던 유적들의 아름다움과 의미와 사연을 되짚으니 얼마나 앙코르와트에서의 하루가 아쉬웠던지. 이 책을 읽으며 페이지를 넘기면서 아이고 아깝다 소리를 수십번 내지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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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더 하면 이 책은 단순한 기행문만은 아니다. 대만의 ‘문화적 지주’라는 장쉰의 유려한 문장도 문장이겠거니와 번역자 박지민이 글맛 나게 , 성의 있게 한국어로 번역한 테가 충만하다. 그래서 장쉰이 바라본 앙코르를 생생하게, 풍성하게 ‘터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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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의 여명은 마치 이른 아침에 열리는 수업 같네.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핏빛을 띤 금빛을 보았고 붉은 연꽃들을 보았고 이제는 사라져 버린 찬란하게 빛나던 한 제국을 보았다네. 해가 떠오르고 나자 멋진 공연이라도 본 듯 박수를 치는 이도 있었고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조용히 떠나는 이도 있었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환호하게 만들고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갑자기 침묵하게 만들고 감상에 젖게 하고 슬픔과 기쁨이 교차해 말로 형언하게 만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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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람들은 앙코르와트 관광에 기본 일주일은 잡는다고 했다.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에 숙소를 잡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앙코르와트 인근을 샅샅이 발로 훑는다고 했다. 가이드에게 그 설명을 들었을 때 그런가보다 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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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觀光)을 뜻 그대로 풀이하면 빛을 본다는 뜻일진대 자신과 익숙하지 못한 곳에서 새로운 빛에 접한다는 뜻일 터, 그 빛이란 캐면 캘수록 쏟아져 나오고 발품을 팔면 팔수록 무성하게 우거지는 법이다. 경주를 백 번을 가 봐도 불국사에서 석굴암 걸어 올라가 동해의 일출을 볼 때의 느낌을 알 수 없듯, 다보탑 석가탑이 좋긴 하지만 경주 남산 곳곳의 이름없는 불탑들에서 더 웅숭깊은 인상을 받듯, 단 하루에 앙코르를 ‘보았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교만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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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전체가 한권의 불경 같아. 불경의 글귀는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차고 달이 기울고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곳 어디에든 다 있다네. 태어나고 죽고 이렁나고 소명하는 과정에서 읽고 불리고 전해지면서 인간의 깨달음을 기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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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에 가지 않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앙코르와트를 다녀 온 사람도 이 책을 읽어 보면 좋은 이유는 또 한 번의 앙코르 여행을 공짜로 (책값을 제외한다면) 재연해 주기 때문이다. 찌는 더위와 사람들의 홍수 속에 떠밀리듯 스쳐 지나갔던 앙코르와트의 100미터 부조. 그 속에 담긴 장대한 힌두교 신화와 조각들의 의미를 손으로 하나 하나 짚듯 설명해 주고 더듬어 주고 돌이켜 주고, 톤프레삽 호수에 얽힌 이야기들을 곰삭은 가자미식해처럼 새콤달콤하게 곱씹어주고, 그 장대한 폐허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혔다가 돌아나올 때 마주하게 되는 캄보디아의 오늘의 남루함과 비참함에 대해서도 담담히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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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의 강한 햇살이 여러 각도에서 여신의 몸으로 쏟아지면 빛을 받은 부분과 받지 못한 부분이 올록볼록 음영의 대비를 이루며 그 풍만한 몸이 하나 둘 부활하고 인간의 체온을 갖게 된다네...... 수백년 동안 버려진 땅의 넝쿨에 뒤덮여 있었지만 인간 세상에 대한 결코 사라지지 않은 그리움과 미련이 느껴졌어. 아름다움은 대체 어느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이렇게 하나둘 깨어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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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프롬 사원의 여신상을 지나며 장쉰은 감격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의 뒤에 어둠이 덮쳐오는 역사에 가슴 아파한다. “우유바다 (힌두교 신화에 등장하는 우유의 바다)가 끊임없이 출렁이면서 한 떨기 꽃같은 여신들이 태어나 춤을 추고 그에 따라 죄악과 살인과 탐욕과 그치지 않는 고통과 슬픔이 생긴다네.” 그러나 장쉰과 같이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상상하기 어려운 문화 유산에 압도되어 돌아나오는 중 마주친 ‘원 달라’를 부르짖는 아이들, 한쪽 팔다리가 없는 사람들, 두 손을 내밀며 애처로운 시선을 던지는 아이와 엄마. 앙코르와트 문 앞의 설탕나무, 날카로운 가시 많던 그 나무에 아이들을 패대기쳐 죽였다는 참혹한 캄보디아 현대사와 마주치는 극단의 문화적 열탕과 냉탕의 기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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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은 그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깊은 산골 폐사지, 절도 스님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적막한 빈터. 뿌리째 뽑힌 주춧돌이 모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무성히 자란 잡초들이 그 옛날을 덮어버린 폐사지에 가면 사람의 마음이 절로 스산해진다. 단청 화려한 건물에 금색 빛나는 불상을 모셔 놓은 절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처연한 정서의 환기가 있고, 고요한 절터에는 사색으로 이끄는 침묵이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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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적 질적인 차이는 있다지만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유적들 역시 일종의 폐사지라 할 것이다. 영화롭고 찬란했으되 참혹한 전쟁을 겪었고 밀림의 습격에 뒤덮였으며 수백년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옛 사원들을 관광객 없는 시간, 홀로 걷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나무 뿌리의 포로가 돼 그 몸이 토막이 나 부서지고 들떠 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12세기의 여신 조각들, 부서져 내린 돌덩이조차 웅장한 사원의 새벽, 솟아오른 탑들 사이에 뜬 달을 바라보며 맥주 한 잔을 기울인다면 베르사이유 궁전과 마천루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할 뭔가를 지닐 수 있을 것 같다. 장쉰도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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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그 어떤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네. 아름다움은 뺏아 갈 수도 없어. 아름다움은 억지로 가질 수도 없다네. 아름다움은 점점 옅어져 가는 석양의 여광 속에 있는 한 조각 아름다움의 폐허일 뿐이네. 제국과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똑같이 폐허가 되지. 우리는 그 속에서 존재의 허망함을 보고 어쩌면 씁쓸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지....... 아름다움은 언제나 폐허로 향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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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고 다시 이 책을 들고 한 열흘 일정을 잡아 시엡립 (앙코르와트를 품은 도시)으로 다시 갈 것이다. 다시 한 번 보았던 것을 깊이 보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으리라. 우리 역시 폐허의 돌조각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그 ‘아름다움’의 일부가 될 것이지만 그 전에, 나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 만리 밖 나라 사람들이 쌓았으나 무너진 폐허의 아름다움을 나의 일부로 만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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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해야겠다. 갈 곳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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