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과학 에세이] 여러분이 가장 먼저 배운 제2언어는 무엇입니까?

Globe_of_language.png

언어의 시대

우리는 언어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시장이 국제화되면서 영어 뿐 아니라 제3외국어까지 배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기업들 또한 구직자들에게 언어 능력을 요구합니다. 이력서에 할 수 있는 언어를 적는 란이 따로 있습니다. 공대생들은 이 언어란에 C#, C++, JAVA, Python 등을 적고 싶은 마음이 굴뚝입니다. 벌써 영어를 제외하고도 네 개의 언어를 더 할 줄 아는 셈이니까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 적으면 안되지?N'외국어'라고 하지도 않았고,N'언어'라고만 적혀 있는데?" 게다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른 언어의 정의는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입니다. 청자가 컴퓨터일 뿐, 프로그래밍 언어도 내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임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준비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먼저 배운 제2언어는 무엇입니까?

만국의 공통어 수학

예상해 보건대, 여러분들이 가장 먼저 배운 제2언어는 수학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입을 우물거리며N'어어..ㅁ..마!" 를 외친 이후부터 가,나,다 따위가 적힌 한글 카드와 1, 2, 3 따위가 적힌 숫자 카드들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엄마"를 먼저 배웠으니 한국어가 제1언어일 것이고, 수학의 기초 문자인 1, 2, 3 을 익히기 시작했으니 분명 수학은 여러분에게 제2언어가 됩니다. 누구도 1, 2, 3 전에 A, B, C 를 배우지는 않을 터입니다. 물론N'수학' 자체가 언어인 것은 아닙니다. 엄밀하게는N'수학 언어'라고 일컫는게 옳을 듯 합니다.

'수학 언어'는 수많은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자로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 체계입니다. 보통의 언어는 문자가 음성 언어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음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언어가 익숙한 개념은 아니지만, 이것도 분명한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수화는 그 나라의 음성 언어와 대응되지 않고 독자적인 문법체계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농인들은 음성 언어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화는 음성과 결부되지 않고 오로지 손짓의 형태로 정보를 전달합니다.N'수학 언어'도 마찬가지 입니다. 음성 언어와 결부되지 않고 문자로써 독자적으로 정보를 전달합니다.

문자 체계는 보통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로 분류되며, 표음문자는 다시 음절문자와 음소문자로 나뉩니다. 표음문자는 문자를 소리에만을 대응 시키고, 표의문자는 문자를 의미에 대응시킵니다. 표의문자도 읽는 법이 있지만, 어떻게 읽는지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로, 음소문자는 한글을, 음절문자로는 히라가나를, 표의문자로는 한문을 들 수 있겠습니다. 다닥다닥 붙은 세 나라가 서로 너무 다른 언어와 문자 체계를 가진 점은 참 흥미롭습니다.

음소문자
음절문자
표의문자
의미
(한글)
(히라가나)
(한문)
ㄱ +ㅏ→ 가
하늘
g, k + a → ga, ka
ka
tiān
나 + ㅏ→ 나
n + a → na
ki
de
다 +ㅏ→ 다
검다
d + a → da
ku
xuán
ㄹ +ㅏ→ 라
노랗다
r, l + a → ra, la
ke
huáng

위 문자 분류에 따르면,N'수학 언어'는 표의문자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N'天'을 한중일 각자가N'천',N'티엔',N'텐'으로 발음하지만 모두N'하늘'을 의미하 듯, 수학의 언어는 모든 나라에서 전부 다르게 읽히지만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 집니다. 우리는 아래의 식을 "일 더하기 일은 이"라고 읽지만, 영어에서는 "one plus one is two"라고 읽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나 영어를 하는 사람이나 동일한 정보를 전달 받을 수 있습니다.

image.png


수학 언어는 일상의 정보를 전달할 수 없지만, 수학적 정보를 매우 효율적으로 전달합니다. 굳이 음성언어로 전환하지 않더라도 바로 그 의미를 알 수 있고, 오히려 음성언어로 번역함이 의미를 훼손할 때가 많습니다.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어려운 영어 원서를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수학 언어 덕분입니다. 수식 한 두줄이 장황하게 적힌 영어 문장에 담긴 정보 대부분을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현재 아라비아 숫자와 그리스 문자, 그리고 각종 기호들로 구성된 수학언어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공통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학이 어려운 이유

솔직하게 수학이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높은 수준의 논리력과 문제해결의 창의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수학이 어려운 이유를 꼽아보자면,N'수학 언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학을 하려면N'수학 언어'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마치 프랑스어로 문학 작품을 쓰려면 프랑스어를 알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학생들을 옆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은 문제풀이를 이전에N'수학 언어'로 문제를 번역하거나,N'수학 언어'로 된 문제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에 문제를 겪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수식이 문제에 주어졌다고 해보겠습니다.

image.png


여러분은 image.png와 image.png에 대해서 어떤 정보가 들어 오십니까? 저는 전공 탓에, 위 식을 보고 image.png가 너비 2 짜리 삼각형 모양의 신호로서 t에 따라 x축의 오른쪽으로 진행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image.png는 주기 2 짜리 사인 함수로 image.png 꼴로 나올 것이며 image.png는 image.png와 관련된 값으로 image.png의 진폭이 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문제를 내지도 않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여기서부터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반대로 학생들에게 너비 2짜리 삼각형 모양의 신호로서 t에 따라 x축 오른쪽으로 진행하는 함수를 적어보라고 하면, 더욱 어려워 합니다.N'수학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수학을 잘 하려면N'수학 언어'에 어느정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물론 수학의 본질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 언어에 비유해 보자면, 문학 작품은 화려한 문체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있는 철학과 내용 때문에 명작이 되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글을 제대로 쓸 줄 모르면서 집필을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N'수학 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언어 학습을 위한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특히 학교에서 문제가 대부분 객관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N'수학 언어'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연습은 하지만, 반대로 일반 언어로 된 문제를N'수학 언어'로 바꾸는 연습은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는 분명히 해보라고 되어 있는 증명문제를 푸는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눈으로 나마 답지를 훑어보면 다행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영어 교육과 비슷합니다. 학생들은 영어를 10년을 배워도 읽을 줄만 알지, 말할 줄도 쓸 줄도 모릅니다. 언어를 배우려면 본인이 직접 입으로든 손으로든 말하고 적어야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수학 풀이 과정을 보면 두서가 없습니다. 등식을 세우지 않고 숫자와 문자만 연습장 여기 저기에 적습니다. 언어를 익히려면 먼저 전체 문장을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연습장 여기 저기에 단편적으로 적어 푸는 것은 단어 나열식으로 말하기 연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언어 학습의 가장 중요한 점은 꾸준함입니다. 이미 잘 아는 언어도 몇 개월 쓰지 않으면 어눌해 집니다.N'수학 언어'도 마찬가지여서 꾸준함 없이는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수학도 통역이 되나요

[Appendix] 교양을 위한 양자역학 에서 저는 일상의 언어로 양자역학을 설명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N'수학 언어' 없이 물리학을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의미가 잘못 전달될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 문학이나 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번역본이 아닌 원전을 본다고 합니다. 언어가 달라졌을 때 의미가 온전히 전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학도 마찬가지 입니다.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도 그의 저서N'평행우주'에서 이점을 설명했었습니다. 그는 언어의 오해의 대표적인 사례가, 대중들이N'불확정성의 원리'를 단순히 측정 기술의 한계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N'불확정성의 원리'는 철저히 수학적인 논리에 의해서 도출된 결론임에도 말입니다.

원래는 수학 언어도 여느 언어와 다를 바 없이 일상의 영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살이 찢겼을 때 난 피를 보고, 또 들판 핀 꽃을 보고 사람들이 "빨강"이라는 속성을 추상화하여 언어에 담은 것처럼, 사람들은 물체들 사이에서 1, 2, 3 과 같은 숫자의 속성을 추상화하여 언어로 만들었습니다. 더하기, 빼기 같은 사칙연산까지 얻어 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수학 언어를 이용해 한 수준 더 높은 개념을 추상화해 냈고, 또 그 개념은 다음 개념을 추상화해 나갔습니다. 더하기에서 곱하기를 얻고, 곱하기에서 거듭제곱을, 거듭제곱에서 다시 제곱근과 로그의 개념을 얻었습니다. 일상에 기반하지 않은 수학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와 멀어져 갔습니다. 서로 간의 통역이 어렵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수학 언어는 일상 언어와 멀어지며 자신의 가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일상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을 수학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인류는, 전공자가 아니라면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굉장히 높은 수준의 과학 지식에 도달해 있습니다. 수학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과학 지식까지 인류를 이끌어 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국어 다음으로 배운 언어가N'수학 언어'이지 않습니까? 비록N'수학'을 잘 못하더라도, 인류를 발전시킨N'수학 언어'를 내가 조금은 안다고, 어디 몇 백만 광년 떨어진 행성에 살고 있을 미개한 외계인에게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포맷변환_수학.jpg
0
0
이 글을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이 글을 트위터로 퍼가기 이 글을 카카오스토리로 퍼가기 이 글을 밴드로 퍼가기

자유 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526 자유 게시판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2) : 종의 분화 icon Work4Block 08-21 4,184
525 자유 게시판 [과학 에세이] 종 예외주의 (1) : 들어가며 icon Work4Block 08-21 3,205
524 자유 게시판 존메이와 함께한 특별한 장례식 - 스틸 라이프(Still Life) 2013 / 우베르토 파솔리니 icon Work4Block 08-21 2,501
523 자유 게시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건이 아쉬웠던 이유 icon Work4Block 08-21 3,058
522 자유 게시판 복수는 천천히, 그리고 차갑게 - 녹터널 애니멀스(Nocturnal Animals) 2016 / 톰 포드 icon Work4Block 08-21 2,896
521 자유 게시판 사회가 낳은 폭력의 바이러스 - 인플루엔자(Influenza) 2004 / 봉준호 icon Work4Block 08-21 3,037
520 자유 게시판 온전히 스스로의 것으로 색을 내는 꽃은 없다 - 스토커(Stoker) 2013 / 박찬욱 icon Work4Block 08-21 2,941
519 자유 게시판 영화 <버닝> 해석 및 후기 icon Work4Block 08-21 3,716
518 자유 게시판 모든 아름다움은 폐허로 향한다 - <앙코르인문기행> icon Work4Block 08-21 4,128
517 자유 게시판 <공부> 볼린저밴드 변수값이 갖는 의미 icon Work4Block 08-21 9,001
516 자유 게시판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세계 배당금, 무역 전쟁 와중에 2분기 신기록 달성 icon Work4Block 08-21 2,553
515 자유 게시판 [Appendix] 카쿠와 마윈이 말하는 미래 icon Work4Block 08-21 4,038
514 자유 게시판 [초간단 미술사] 플라톤의 현대미술가 입국심사 icon Work4Block 08-21 3,571
513 자유 게시판 터키 금융 위기, 다른 지역으로 전염될 가능성 낮다 icon Work4Block 08-21 3,086
512 자유 게시판 [초간단미술사] 뒤샹의 변기N'샘'의 모든 것 icon Work4Block 08-21 2,638
511 자유 게시판 [초간단 미술사] 그림의 탄생 icon Work4Block 08-21 3,298
510 자유 게시판 개인 투자자가 꼭 알아야 할 8명의 투자자 icon Work4Block 08-21 3,525
509 자유 게시판 [Appendix] 미치오 카쿠가 말하는 양자 컴퓨터 icon Work4Block 08-21 3,395
508 자유 게시판 [과학 에세이] 미래에는 음성 언어가 사라질까? (2) icon Work4Block 08-21 2,826
507 자유 게시판 [과학 에세이] 미래에는 음성 언어가 사라질까? (1) icon Work4Block 08-21 3,215